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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need a miracle



 역사가들은 1940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의 이 2주간의 시간을 2차 세계대전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로 보는데, 그건 독일이 글자 그대로 전쟁을 이겨버릴 수 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이 유럽대륙을 평정하자, 이제 독일의 총부리는 영국을 향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인간이 두 발로 바다를 건너갈 수 없는 일. 독일군이 영국에 상륙하기 위해선 세계 최강 영국 해군을 초토화 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아니 그걸 우리보고 하라고????"

 "그럼 내가 하지!"

 그간의 전투 손실로 도버해협조차 못 건너는 독일 해군이 죽을 소리를 내자, 공군 원수 괴링은 공군의 힘만으로 영국을 쓸어버리겠다고 자처한다.

 그리하여 1940년 8월 13일. 마침내 독일 공군은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 폭격을 시작한다.

 1200기의 폭격기와 1000기에 달하는 전투기를 거느리고, 독일군은 런던 이남에 위치한 주요 군사시설을 매일 같이 폭격한다. 이에 맞서는 영국군은 고작 640여대의 전투기만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야했다.

 아니, 이겨낼 수가 없었다. 

 공중에선 수많은 파일럿과 전투기들이 산화되고, 지상의 활주로와 레이더망은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다. 비상착륙하던 전투기들은 폭탄구덩이에 쳐박혀 활주로에서 폭발하고, 폭탄이 연료저장고에 떨어지면 일대는 말그대로 불바다가 되버렸다.

 보름간의 공격으로 영국군은 만신창이가 되버렸고, 이대로 공격이 일주일만 더 계속된다면 영국이 독일 손아귀에 떨어질 판이었다. 

 1940년 9월 1일. 영국 공군의 휴 다우딩Hugh Dowding 사령관은 작전 브리핑을 하다말고 신을 향한 절규를 내뱉는다.

 "나는 신이 우리 영국을 버렸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난 전능한 신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다. 그 어떤 기적도 벌어지지 않는 한, 우린 이 전쟁에서 지고 말 것이다."

..........


 런던에 도착한지 어느 덧 5일 째.

 그 날도 시내버스 일일 이용권을 끊고는, 아무거나 잡아탄 채 멍하니 창밖 구경만 하고 있었다. 늦겨울, 우중충한 날씨 속에 무표정한 런던의 도심과 부도심을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창밖으론 초대형 전함 주포가 달려있는(?) 건물이 지나간다.

 '응???'

 버스 뒤로 빠르게 사라져가는 그 주포를 따라 고개가 돌아가는 동시에, 본능적으로 하차 버튼을 누른다.

 대영제국 시절에 지어졌을 웅장한 건물. 이미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질리도록 본지라 건물에서 느끼는 감흥은 크지 않지만, 그곳은 나를 잡아 끄는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여긴 뭐하는데에요?"

 마당 앞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쭐래쭐래 따라들어가 도대체 여기가 뭐하는지 물어보니, 그제서야 여기가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이란 걸 알게 되었다. (건물에 괜히 대포가 달려있던 게 아니다.)

 2차 대전시절 날라다니던 스핏화이어나, 연합군의 주력 탱크였던 셔먼탱크는 물론, 독일군의 V2로켓과 BF 109E 같은 독일군 전투기까지 전시되어있던 이곳. 내가 살던 곳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러 다니는 것이 여행이라면, 이 곳은 별천지 중에 별천지였다.



 굵직굵직한 중장비가 있는 1층 홀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니 이번엔 1차 대전부터의 사료들을 모아논 곳이 나타난다. 너무 넓어서 대충 훑어보는 것만해도 몇시간이 걸릴지경이라 종종 걸음으로 돌아다니다가도, 무려 19금이 붙어있던 유태인 학살 기록관과 런던 대공습 당시의 일반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꾸며 놓은 '블리츠Blitz 체험관'을 걸을 땐 자연스레 발걸음이 늦춰졌다.

 "우리가 이 고난을 이겨내어 대영제국이 천년을 지속하게 된다면 후세 사람들은 바로 그 때가 영국역사의 최절정기였노라고 말할 것입니다."

 - 1940년 8월.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다우딩 사령관이 기적을 보여달라고 울부짖을 무렵, 기적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본토항공전Battle of Britain이 한창인 8월 24일. 편대에서 낙오된 독일공군 폭격기 2대가 런던 한복판에 오폭사고를 일으킨다.

 "헉, 지금 니들이 내 X알을 걷어찬거냐?!"

 지금이야 '전쟁'하면 파괴된 시가지부터 떠오르지만, 그때만해도 기사도 정신이랄지, '어차피 전쟁 끝나면 다 우리 나라 사람이다.'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삼가던 불문율이 있었다. 아무리 실수였다한들 그 불문율이 깨지자, 이제 전쟁은 물불 안 가리는 전면전으로 돌입한다.

 오폭 다음 날인 8월 25일, 영국은 즉각적으로 베를린에 보복 폭격을 감행한다. 9월 4일까지 이뤄진 이 폭격으로 이번엔 히틀러의 뚜껑이 열려버렸다. 

 "한 번 실수한 걸 가지고 이따위로 몰아쳐? 그래, 이젠 런던을 쓸어주마!"

 일주일. 딱 일주일만 더 히틀러가 참았다면, 2차대전의 승전국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히틀러가 이렇게 열불내고 있을즈음 다우딩 사령관은 신을 향한 절규를 내뱉고 있었고, 실제로 영국군의 상황은 도무지 말이 아니었다.

 베를린을 두들길 폭격기는 있어도 런던을 지켜낼 전투기는 전멸에 가까웠고, 도대체 처칠은 뭘 믿고 베를린을 폭격한 걸까 싶을 정도로 영국 공군은 붕괴 일보 직전이었다.

 "쿵, 쿵, 쿵쿠쿵"

 9월 7일. 엊그제까지 공군기지만 공격하던 독일공군은 800기의 폭격기와 600기의 전투기를 끌고 런던에 폭격을 감행한다.

 서민들이 살고 있는 이스트엔드부터, 국왕 조지 6세가 살고 있는 버킹엄궁전까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 만 발의 폭탄은 도시를 새빨갛게 불살랐고, 수많은 런던 시민들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영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고난의 시기로 기억되는 블리츠Blitz, 런던대공습의 시작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런 지옥의 불기둥이 영국에 찾아온 기적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

 런던시민들이 대신 폭격을 맞는 동안 영국 공군은 필사의 재정비에 돌입한다. 밤을 세워 비행기를 고치고 구멍 뚫린 활주로를 다시 깐다. 피로에 쩔은 파일럿도, 부상을 입은 지상요원들도 하나둘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렇게 다가온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일본 함대를 수장시킨 것처럼, 영국군은 전국에서 긁어모은 370여기의 전투기로 1100여기가 넘는 독일공군에 극적인 대승리를 거둔다.

 "지금까지 기록된 인류의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은혜를 입은 적은 없었습니다."

-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조종사들을 치하하는 연설 중에서

 영국에겐 영광의 승리를, 독일에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이 전투를 계기로 독일은 영국침공을 포기한다. 

 "어쩔 수 없다. 런던은 접어두고, 모스크바를 먼저 치자!"

 9월로 넘어가면서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도버해협과 암울하기 짝이 없는 영국의 겨울날씨가 시작되었고, 히틀러는 소련을 먼저 침공하고 영국을 나중에 손 보겠다했지만, 이 결정은 나치 독일을 패망으로 이끈 결정적인 패착이 된다. 동으로는 소련을, 서쪽으론 영국과 미국을 상대하게 된 독일은 1945년 5월 8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일본마저 굴복시킨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런던대공습이 조선에게도 찾아온 기적이었다는 걸...

 런던대공습이 없었다면, 런던 시민들이 시련을 감내하길 거부했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텐노헤이카반자이!(천황폐하만세)'를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도 런던을 떠올릴 때마다 내 심장은 두근거린다. 웅장한 타워브릿지보다도, 여왕님이 살고 계신 버킹엄궁전보다도, 템즈강 바닥에 가라앉은 수 많은 폭탄 속에서 피어난 기적들이 내 심장을 뛰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심장을 뛰게 만든 건 천장에 매달려있는 영국군의 스핏파이어도, 미군의 셔먼탱크도 아니었다. 내 심장을 미친듯이 쿵쾅거리게 만든 건, 유리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는 빛바랜 호외의 헤드라인이었다.

 "TODAY IS V.E. DAY!!" (오늘이 우리의 승전일입니다!!)

 한 장의 낡은 호외에서 전해지는 승리의 감격은 나를 1945년 5월 8일, 유럽승전축하 퍼레이드 한복판으로 데려왔다. 승리의 기억이 없는 나에게, 좌절과 실패의 기억만 가득한 나에게, 빛바랜 종이 한 장은 내 가슴 한 복판에 불을 질렀다.

 런던에 머문지 어느 덧 닷새.

 런던이 좋아서가 아니라, 또 낯선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게 두려운 나머지, 난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찌질한 나에게도 기적이 찾아올까. 아니,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나의 삶에, 그 어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남은 삶을 끝까지 살 자신이 없다.

 내가 찾는 '그 무엇'이 기적이라면, 그것도 내 인생에 단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이라면, 어디서도 못 찾았기에 어디라도 찾아 나서야할 것 같았다.

.....

 "아직 런던에 5일 밖에 안 있었잖아요? 그리니치 천문대도 가보고, 오페라의 유령도 보고 가야지?"

 다음 날 아침. 민박집 아주머니는 어떻게든 더 붙잡으려고 애쓰셨지만, 다음 번에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만을 남기고 버스터미널을 향했다. 그리고 잠시 짬을 내 승전기념일 호외 앞에 다시 섰다.

 '나도 기적을 만나고 싶다. 비참하기만 한 내 인생에서 나도 뭔가를 이뤄냈다고, 나도 내 현실을 이겨냈다고 하고 말하고 싶다......'

 그런 기적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는 한 그것을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기적을 찾아서, 어디에 있을지 모를 기적을 찾아서,
 나의 여행은 이제 본격적으로 낯선 내일을 향한다.
by ERGINE | 2010/05/17 04:20 | 낯선 여기 | 트랙백
드래곤 길들이기 3D ★★★★★
 
몇달동안 개봉일만 손꼽아 기다리던 드래곤 길들이기.

 매일처럼 CGV 홈페이지 검색 두들기면서 언제 개봉할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 마침 동네 CGV에서 시사회를 한다길래 엄마 차타고 달려갔다.

 "엄마, 지금 12분 남았는데 표가 있을까?"

 "우리처럼 월요일 저녁부터 한가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

 그래도 요즘 백수가 많다던데 영화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지도 모른다. -_-;;

 데스크에 갈 때까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엑셀을 힘차게 밟아 데스크 도착!  (상영 7분 전)

 "손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시사회라서 발권이 안 됩니다."

 "네!?! 그럼 표 받으려면요?"

 "시사회 이벤트에서 당첨된 분만 가능해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모시고 여기까지 왔는데, 허탕치고 돌아가야할 판.

 기름값이 아쉬워서 다른 거 볼만한 거 없나 보니.. 정말 없다..

 킥애스는 저번에 보고 (두 번 다신 마벨 코믹스 출신 작품 안 보리라 다짐했고..)

 아이언맨2는 마벨 코믹스 출신이라 당근 패스.

 나머지는 대기 시간이 1시간 넘게 남아있어서 OTL.....


 자포자기 심정으로 다시 엘레베이터를 향하는데,

 엘리베이터에 나부끼는 종이 한 장을 보고 지하 주차장이 아닌 위층으로 올라간다.

 [시사회 오신 분들은 10층으로 바로 올라오세요!]


 시사회가 코앞인데 매점 앞엔 달랑 책상 하나 가져다 놓고 표를 나눠주는 시사회 담당 직원 한 분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수북~히 쌓여있는 표를 보아하니 두 장 정도는 융통해 볼 만해 보였다. (상영 3분전)

 "저기요.."

 "네?"

 "여기서 오늘 이거 시사회 한다는 것만 보고 무작정 왔는데요. 어머니 모시고 왔는데 표 두장만 받을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천국/지옥/천국을 왕복한 기분.

 당첨자 중에 반도 반도 안 와 영화관은 절반이 비어있었고, 우리 모자를 위한 최고 명당자리도 용케 남아있었다.
 거기에 공짜라 더 바랄게 없다.

 다만 한 가지.

 "그러고보니... 엄마랑 같이 본 영화 중에 재밌는 영화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 중에 최악은 <마더>였다. -_- 모자가 같이 보기엔 참 당황스럽던;;;;)

 "항상 그럴거라는 편견을 버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었다.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가 있을 수 있다니!

 한 장면 한 장면, 페로제도와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떠오르고,
 
 주인공 히컵이 투쓰리스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에선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았다.


<삼성을 생각한다> 때문에 며칠 째 뒤숭숭한 가슴도 한 번에 뻥뚫어지는 기분,

 영화 한편으로 이렇게 행복해지는 거, 정말 오랫만에 느껴본다.

........


 겨울을 미워한다고 겨울이 따뜻해지진 않는다.
 전쟁을 반대한다고 전쟁이 멈추진 않는다.

 어떤 존재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만으론,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  

 길들여라.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을,
 네가 미워하는 모든 것들을,
 네가 증오하는 모든 것들을.

 그것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



by ERGINE | 2010/05/04 03:36 | 일상의 탐험 | 트랙백 | 덧글(2)
<삼성을 생각한다>
 큐티 거니씨가 고대에 명박 받으러 왔을 때,

 그 시위에 참여해 큐티 거니를 엿 먹인 후배가 있다.


 무려 민노당 당원으로 사회 정의니 어쩌니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 녀석은

 어이없게도 졸업 후 첫 직장을 삼성전자로 골랐다.


 "시위할 때 찍힌 사진... 그거 발각되면 어쩌죠?"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 보단, 과거의 행적이 들통나는 걸 걱정하던 그 녀석.

 "넌 자존심도 없냐, 이건희한테 계란 던진 녀석이 '거니재용 만세!'하는 그 매스게임을 하겠다고!?"

 "아 그럼 형이 삼성 월급만큼 주고 날 채용하던가!"
 
 "......."

 자신의 신념을 배신하는 한 인간에 대한 실망과 대안을 내놓을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절망.

 그 날은 정말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삼성을 생각한다> 읽으면서 난 다시 한번 그 때의 실망과 절망을 느꼈다.
 
 '삼성카드 잘라야 하나.'

 '애니콜 버리고 이 참에 아이폰 사야하나.'

 '에어컨은 어쩌지... 이건 좀 비싼데 ㅠ_ㅠ'


 일본은 싫어도 재패니메이션은 버릴 수가 없는 덕후나

 미쿡은 싫어도 아이폰에 열광하는 애플빠가 된 기분.


 내 모교의 건물부터가 삼성관이었던 것처럼

 삼성에서 일하진 않아도, 한국에 살면서 삼성 그 자체를 거부할 방법은 없다.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선 삼성이란 이름이 한편으론 '애틋'하기에 문제는 더 복잡하다.

 나도 피카딜리 써커스에서 SAMSUNG 입간판을 볼 땐 온 몸에 전율을 느꼈고,

 삼성 매출이 소니를 제쳤을 땐 내 일처럼 신났었다.

 나에게도 삼성은 말 그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이름이다.


........


 영국에 머물고 있을 때, 한 환경운동가를 만났다.

 그는 풍력발전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풍력발전반대 지지서명을 받고 있었다.

 "영국은 수많은 새들의 천국인데,

 풍력발전기 날개에 매해 수천마리의 새들이 충돌해 죽는다구요!

 어떻게 이런 일들을 그냥 냅둘 수가 있겠어요! 우리 다 함께 풍력발전을 반대해요!"

 짜증이 났다.

 '그럼 전기는 뭘로 생산하란거지?'

 '매연 풍부한 화력? 오염원 만땅인 원자력? 연어의 고향을 파괴하는 수력발전!?'

 '아, 아예 전기없는 18세기로 돌아가자는건가?'

 김용철 변호사의 책을 읽는 기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선, 정의도 질 때가 있다는 것 밖엔 느끼지 못했다.

 '그래, 당신 말대로 삼성은 썩었어. 이건희는 당신 말대로 정말 나쁜 놈이야.'

 '그럼 뭐, 그래서 어쩌라고?'

 '멘도자처럼 칼들고 싸우다 죽어야 하나?'

 '가브리엘 신부처럼 그냥 순순히 총맞고 죽을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힘없는 서민들을 상대로 꺼낼 이야기가 아니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하고, 세금 잘내고, 비자금 만들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큐티거니씨와 이재용 귀꾸녕에 쳐넣을 이야기지

 2년 2개월 만기제대. 건강보험, 국민연금, 온갖 세금 꼬박꼬박 내는 내가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어떻게든 자기의 목소리가 이건희 회장에게 들리도록 했어야지,

 '이것 보세요! 이건희는 이런 놈이래요!' 할 필요가 없었다.

 애시당초 말이 통할 사람이 아니라면,

 김변호사는 작가가 되기보단 정치가가 되는 게 낫지 않았을까.

........


 김정일이 싫다고 평양 냉면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간첩질하는 것들까지 OK할 생각은 없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평양냉면을 싫어하기로 작정한다한들

 김정일 죽는 날이나, 통일의 그 날이 앞당겨지진 않는다.   


 삼성이 밉다고 애니콜까지 싫어해야할까?

 삼성에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풀어낼 적당한 해법과 전략이 필요한 거지,

 더 큰 증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 어쩌면 이 책엔 그런 게 있는 줄 알았다.

 절망적인 화력의 열세에서도 Na'vi족을 승리로 이끈 그런 전략이 <삼성을 생각한다>에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삼성을 생각한다>에 남아있는 건, 절망적인 패배의 기록이었다.

 비록 그가 정의의 편이라 해도, 진 건 진거다.

 김용철 변호사. 그는 정의도 진다는 걸 보여준 비참한 패배자였고,

 왜 졌는지 알지만, 어떻게 이겨야할 지를 못 보여준... 21세기 멘도자였다.


 나는 가브리엘도 싫고, 멘도자도 싫다.

by ERGINE | 2010/04/28 04:49 | 일상의 탐험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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